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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예술남자의 예술라이프입니다!



오늘은 영화 '대립군'에 대해서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정재 배우는 관상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보여줬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악역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광해군을 돕는 정의로운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자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ㅎ





줄거리


1592년 임진왜란, 선조는 어린 광해에게 조선을 맡기고 명나라로 피란한다. 의병을 모으기 위해 강계로 떠나는 광해와 분조 일행은 먹고 살기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는 대립군들의 호위를 받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공격에 조선의 왕을 잡으려는 일본군의 추격까지 더해지고 위기를 감지한 대립군의 수장 토우는 곡수를 비롯한 대립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와 함께하기로 한다.

생사를 오가는 고난 속에서 운명을 함께하게 된 광해와 대립군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로 닮았음을 느낀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분조와 대립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는데…

*대립군(代立軍):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 해주는 사람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
*분조(分朝):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세운 조정




예고편 (역사 코멘터리 포함)




광해군에 대해서 (세자시절) 


영화에서 제시된 광해군의 세자시절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역사를 알고 본다면 더욱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ㅎ


세자 시절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왕위 계승

그 후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로서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어린 상태에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약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여 승하하였다. 이때 교서는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 판단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출처 필요]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유영경은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 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의 거부감만 가중시켜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주살되고, 사후에도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이후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위 이후

즉위 초기

즉위한 광해군은 바로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출처 : 위키백과



대립군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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