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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예술남자입니다!


오늘은 연극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에 대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굿, 역사의 아픔을 보듬다

-제주 4.3 사건에 부침


공연시간 정보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일요일 오후 3시 

4월 22일 오후 3시/ 월요일 공연없음

5월 3일/ 5일 오후 3시 7시






'무혼굿'이란 비명에 갔으나 시체를 찾지 못한 망자의 넋을 찾아 위무하고

저승으로 고이 보내는 굿이다. 제주도의 무혼굿은 두 종류가 있다.

산에서 죽은 넋을 쉬한 '산신맞이'와 바다에 빠져 죽은 넋을 위한 '요왕맞이'다.

<초혼>에는 '요왕맞이' 굿을 한다. 제주 4.3 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을 위로하고

지금 여기 제주가 처한 문제들을 풀어낸다. 굿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동시에

진정한 화해에 이르는 우리의 제의이므로 제주의 들불놀이가 역사의 비극을 태우는

불씻김(불로 맺힌 것을 태어냄) 으로 극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 연극을 보기 전에 4.3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연극 작품의 이해를 더 이끌기 위해서는 그 작품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 또한 중요한 부분의 하나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4.3사건의 시작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6]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과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학살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6월 중순경 김달삼 등은 1948년 9월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벗어났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제주도 빨치산으로 홍보했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남로당과 무관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결말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 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당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해병대 등에게 학살을 당하였고[17],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출처 : 위키백과







굿은 우리에게 비판적인 시선으로 많이 접해있습니다.

하지만 이 굿이라는 것도 문화의 일부분이며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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